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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검고깊은바닥까지

# 아빠와 나와 이선희

 

아빠는 이선희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빠는 이선희의 노래도 좋아했지만 이선희도 좋아해서 엄마에게 그 같은 단발머리를 몇번이나 권했다고 했다. 엄마는 이 이야기를 몇번이나 했고, 언젠가는 아빠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며 아빠를 흘겨본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어렸음에도 좋아하는 여가수의 머리를 권하는 아빠의 행동이 퍽 우습다고 생각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를 흘기면서 이야기하는 엄마와 못들은 척 웃어 넘기는 아빠의 모습은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남았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 한쪽이 아련해졌고, 가끔 검은 단발머리를 볼때, 이선희를 닮은 고모 만났을 때, 이선희의 노래를 들을때마다 그랬다.

 

그래서 이선희의 신곡을 꼼꼼히 듣고 정말 좋다고 느꼈을 때, 아빠 생각이 났던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방에 있는 -보통의 스피커와는 다르게 음역대 별로 다른 소리를 낼 줄 안다는- 아빠가 애지중지하는 아주 오래되고 커다란 스피커로 함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소리를 아는 아빠와 함께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을 듣는다는 건 아주 좋은 생각이고, 적어도 내 인생에 썩 괜찮은 한장면을 기록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으로 가는 내내 그 음악을 듣고 있으면서도 함께 들을 음악 생각에 마음이 벅찼다.

 

아빠와 나와 음악사이에는 또 다른 추억도 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 처음 맞은 생일 나는 간절하게 핸드폰을 바라고 있었고 용기를 내어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한번도 그런적이 없는 아빠가 선물을 사러 나갔었다. 얼굴이 아플정도도 찬 바람이 부는 겨울 밤이었다. 밤 늦게 나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아빠가 걱정되기도 했고, 그 이유가 핸드폰에 개통에 걸리는 시간이라는 생각에 내 기대를 키워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한참이지나 돌아온 아빠는 나에게 이소라 베스트 앨범을 건냈다. 이소라가 얼마나 대단한 가수인지 아빠가 이야기 하는 동안 나는 포장조차 되지 않은 씨디를 실망감을 감추는데 애를 썼다. 그때 나는 그때 핸드폰을 가지고 싶고 아이돌을 좋아하는 소녀였고, 내가 이소라를 정말 알고 좋아하게 되는데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아빠가 그토록 찬사하는 이선희를 듣는 어른이 된 것이다. 그 사실이 날 기쁘게 했다. 아빠가 변하고 내가 변했지만 음악을 듣는 4분 정도는 친밀한 감정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런게 음악이고 나는 이제 아빠와 같은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까.

 

오랫만에 방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었을 때, 아빠는 빨간 눈을 하고 나를 맞았다. 걱정이 됐지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아빠는 이선희를 좋아했었는데 뭐 그정도는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언제나 내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이선희에게도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스피커 이야기를 하시는 듯 하다가 언제나 그래왔듯이 아빠가 얼마나 잘 나갔는지를 늘어놓았다. 당신이 고등학생이던 때는 지금 같은 엠프가 없어 음향효과 연출이 어려웠는데, 문학의 밤 행사에서 누구도 감히 생각하지 못한 효과를 연출해낸 아빠와 그에 놀란 친구들 사이에서 화재가 되었던 이야기, 인쇄기는 커녕 단색 컬러로 작업하던 시절에 수동으로 풀 컬러 초대장을 만들어낸 이야기. 그건 모두 내가 외울만큼 들어온, 끝없이 이어지는, 모두를 놀라게 할만큼 대단한 아빠와 그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는 과거의 이야기였다.

 

아빠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노래를 들으면서 아빠가 음악에 대한 조예와 음향에 대한 지식을 무작정 늘어놓더도 그 4분간 나는 행복하게 대답할 것이고, 또 그럴 수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 결심이 얼마나 하찮았는지 깨달았다.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이런 상황에 크게 마음 아프지 않았다. 

 

나는 적당한 시점에서 끝이나지 않을 아빠 이야기를 끊고, 아빠가 하던 이야기의 이어질 다음 내용을 대신 말했다. 수십번쯤 들은 매번 다른 그 이야기를 내 입으로 정리하고 그 자리에서 돌아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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