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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검고깊은바닥까지

# 아빠와 나와 이선희 아빠는 이선희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빠는 이선희의 노래도 좋아했지만 이선희도 좋아해서 엄마에게 그 같은 단발머리를 몇번이나 권했다고 했다. 엄마는 이 이야기를 몇번이나 했고, 언젠가는 아빠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며 아빠를 흘겨본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어렸음에도 좋아하는 여가수의 머리를 권하는 아빠의 행동이 퍽 우습다고 생각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를 흘기면서 이야기하는 엄마와 못들은 척 웃어 넘기는 아빠의 모습은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남았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 한쪽이 아련해졌고, 가끔 검은 단발머리를 볼때, 이선희를 닮은 고모 만났을 때, 이선희의 노래를 들을때마다 그랬다. 그래서 이선희의 신곡을 꼼꼼히 듣고 정말 좋다고 느꼈을 때, 아빠 생각이 났던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방에 있는.. 더보기
# 아빠와 나 그날을 기억하면 집안 공기가 떠오른다. 계절은 늦 여름이나 가을 즈음 같았고 저녁 시간에 불을 켜지 않은 집안은 어둑어둑 해졌다. 컴컴하면서도 붉은 기운이 맴돌던 좁은 부엌에서 밖으로 나있는 창을 내다보았다면 타는 듯이 지는 노을을 볼 수 있었을 테지만 기억 속의 나는 창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나는 노을을 볼 여유가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형광등을 켤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아. 나는 아직 학교에 들어 가지 전이었고, 내 동생은 나보다 어렸다. 엄마가 왜 아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갑자기 쓰러져서는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방에서 앓고 있는 엄마 곁에도 가지 못하고 방문 밖, 부엌에서 겁에 질린 동생과 앉아 있었다. 집이 좁았다. 엄마의 신음 소리만 들리는 어두워진 거실에서 겁도 먹지 .. 더보기
# 불안 지금의 애인은 내게 참 잘해준다. 이젠 애인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린 잘 어울리니까!'라는 말이 내 입에서 장난처럼 나오는데, 그 순간들을 보면 참 신기하고, 그 신기함이 더 없이 즐겁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그 사실을 편안하게 시인할 정도로 안정감을 느끼고 있구나.'를 단번에 느끼게 해주는 그 장난은 언제나 즐거워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처럼 꺄르르 웃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그리고 내 불안은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첫사랑을 앓았다. 처음으로 내 세상이 타인으로 인해서 재구성 되어서 온전히 다른 세상에 살아보았고 그 세상이 산산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붕괴는 상대 쪽에서부터 일어났는데 감정이 없는 지겨워하는 눈빛 앞에서 나는 쩔쩔매며 울기만 했다... 더보기
출사표 나는 이기적이라서 결국 내가 가장 관심이 있고 잘 아는 건 내 자신이니까, 하고 싶은 말이 가장 많은 건 내 자신에 대해서니까, 내 이야기를 실컷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내와 닮은 타인을 나에게 비추어 볼 수 있다면 타인이 또 다른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 누가 관심을 가져야만 떠들 수 있나? 어제 본 영화의 주인공 말처럼 "나는 계속 이야기 할 거다." 누군가가 듣던지 말던지 궁금해하던지 말던지, 나는 여기에 있으니까 이야기 하겠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자기소개서를, 회고록을, 자기개발서를, 사용설명서를 나는 여기에 쓰겠다. 검고 싶은 내 심연의 바닥까지, 성찰하며 파보자. 더보기